아빠는 6형제 중 둘째셨다. 적지 않은 예전 분들이 그랬듯이 넉넉지 않은 집안에서 맏이보다 오히려 더 맏이 같은 생활력으로 혼자 올라와 서울에 자리를 잡으셨다. 큰아버지도 서울에 계셨지만, 동생들이 의지할 만한 살림은 아니었었는지, 아니면 교사인 엄마와 결혼해서 사는 우리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그나마 더 비빌 언덕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빠의 동생들, 그러니까 나의 삼촌들은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아마 엄마 아빠의 신혼 때부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삼촌들도 어렸을 테니까.내가 기억하는 건 내가 대여섯 살 무렵. 그때 우리 집에 이미 다섯째, 여섯째 삼촌 둘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다섯째 삼촌은 대학생, 여섯째 삼촌은 고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친할머니도 함께.
당시에 시모를 모시고 줄줄이 딸린 어린 시동생들과 함께하면서 맞벌이 생활을 하며 두 어린 자녀를 키웠을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시절은 비록 희미해도 그저 좋기만 했었다.
몇 살 터울 위의 사촌처럼 같이 놀 나이도 아니었음에도 출근을 하느라 집에 없던 엄마 대신 같이 놀아주는 삼촌들이 있었으니까. 그저 집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좋기만 했던 철모르는 아이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삼촌의 자전거가 있었는데 키가 큰 다섯째, 여섯째 삼촌들이 훌쩍 올라타는 높은 자전거였다. 그 자전거엔 뒷좌석이 있었고 삼촌들이 가끔 그곳에 태워주는 게 정말 좋았다. 70년대 서울 변두리 동네가 다 그렇듯 울퉁불퉁 시멘트길인 데다가 쿠션도 없는 뒷좌석이라서 자전거가 덜커덩거릴 때마다 엉덩이가 아팠는데도 삼촌 등을 잡고 빠른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먼지 날리는 길을 휙휙 달려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날은 어딜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자전거를 태워준다고 해서 탔던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먼 경사로에서부터 키가 제일 큰 다섯째 삼촌 뒤에 붙어서 타고 내려오던 중이었다. 아마 그 당시의 다른 자전거에도 없었을 것 같지만, 삼촌의 자전거에도 당연히 아이를 위한 장치 같은 건 없었고 나는 늘 그렇듯 뒷좌석에 앉아 날개를 펴듯 다리를 최대한 양쪽으로 벌리고 있었다. 해가 쨍한 대낮쯤이었고 어린 내게 유난히 길었던 시간이었다. 양쪽으로 들고 있던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저 힘들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내렸다.
바로 이어진 상황은 지쳐 떨군 내 짧은 다리와 발이 한참 경사로를 달리던 자전거 뒷바퀴에 끼었고, 발이 아프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바퀴가 멈춰버린 삼촌의 자전거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사고에 삼촌도 당황했겠지만, 뒷좌석의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도 못 한 채 너무 아프고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하얀 반소매 러닝셔츠를 입은 삼촌은 행여 조카가 크게 다쳤을까 당황해서 나를 달래고 동네 사람들은 쳐다보고…
그다음엔 어땠더라. 아파서 절뚝거리는 나를 삼촌이 안고 왔던가, 우는 내 손을 잡고 한 손엔 자전거를 끌고 왔던가. 그 이후의 일은 거짓말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40여 년 전의 기억인데도 ‘자전거’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어떤 기억보다 짧은 단편영화를 보듯 그때의 모습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른다.
흰 반소매 러닝셔츠를 입은 키가 큰 삼촌의 등.
바람을 가르며 내려가던 경사로.
뒷좌석 양쪽으로 벌린 다리가 아파서 별다른 생각 없이 내렸던 발.
하늘과 땅이 회전하며 우당탕.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는 뜨거운 햇살과 먼지가 가득한 길가에 쓰러진 자전거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어린 나와 그 곁에서 달래며 진땀빼는 삼촌의 모습.
지금은 장성한 자녀를 둔 환갑이 넘은, 여전히 제일 키가 큰 다섯째 삼촌은 그때 자전거가 넘어지는 순간 용케 한 발로 바닥을 디뎠을까? 집으로 나를 데려가면서 만만치 않은 성정의 형수에게 혼날 일을 걱정했을까? 할머니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을까? 다시는 조카를 태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을까?
다음 명절엔 뵈면 그 일을 기억하시는지 한번 여쭤보고 싶다. 어린 조카를 태워주셔서 고마웠다는 말씀과 더불어 그때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는 일을 참 많이 두려워한다고도 말씀드려야겠다.
가끔은 ‘작은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예전처럼 ‘삼촌’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고백은 아마 못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