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April 2017

함께 나눈다.

@카오룽 공원

아이가 아직 신생아일때 조그만 몸을 품에 안고 이 아이가 나를 소리내어 “엄마” 라고 부르는 때를, 종알종알 이야기 하는 때를 상상했었다.
꼬물거리는 손에 손가락을 쥐어 주면 반사적으로 쥐는 걸 느끼면서 언제 이 손에 힘을 담아 나를 붙들고 매달리려나 생각했었다.

아이는 이제 생후 659일. 내일이면 22개월에 접어들고 다다음달이면 두 돌을 맞는다.

옹알거리던 소리가 엄마 아빠가 되고, 멍멍 야옹 소리가 문장이 되었다.
몇달전만 해도 우유를 달라며 “우어우어우어” 하던 아이는 이제 자기 이름을 대며 “**, 우유 머거요.” 한다.
“아냐!” 라고 소리지를 때 “예쁘게 말해야지~?”하면 “아니에요” 할 줄도 안다.

이제 아이는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엄마! 엄마! 아야!아야아야!” 하며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고
기저귀를 갈며 배를 쓸어주면 꺄르르 웃으면서 “간지러” 하고 말하고
욕조에서 머리를 감기려면 울음을 터뜨리며 “무서워” 한다.

겨우 붙잡고 서던 시절엔 아침에 혼자 일어나면 잠든 내 얼굴을 고사리손으로 톡톡 쳤는데
이제는 눈을 뜨면 “엄마 이너나 (일어나) ” ,”안깅(안경) 써” , “엄마 삔 꼬자(꽂아)” 한다.
(앞머리에 삔을 질끈 꽂고 안경을 써야 엄마가 인간의 형태가 되어서 우유를 줄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안다!)
게다가 요즘은 우유를 가지러 일어나려는 내게 “엄마, 가치가 (같이가)” 하기도 한다.

언어란 무얼까.
말 못하는 아이의 울음도 엄마에게는, 부모에게는 이해할 수 있는 나름의 언어였는데
그 울음이 형태를 갖춘 언어가 되어서 다가오니 느껴지는 모든 감정을 몇배로 증폭시킨다.
아프다며 울부짖는 소리에 안타까움이, 간지럽다는 말에 웃음이, 무섭다는 말에 안쓰러움이 밀려나온다.
언어로 표현되는 감정이라는 힘이 얼마나 큰지 나는 요즘 매 순간 느낀다.
농담처럼 “말 안하면 귀신도 몰라”라고 종종 내뱉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말 하면’ 어떤 감정이 생기는지를 이제서야 절절히 체감하는 중이다.

아이의 신체가 자라나고 신체능력이 조금씩 발달해 뒤집고, 앉고, 기고, 걷고, 뛰는 걸 지켜보는 것도 신비로웠지만
단어를, 문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음성화시키고 연습하고, 활용하고, 응용하는 언어의 발전은 감탄스럽고 경이롭다.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이야기 해준 단어들을 기억하고 말한다.
돌이 조금 지났을 때 과일칩 말린 배를 들고 “배 줄까?” 했더니 아이가 자기 배를 가리키며 “배” 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배’라는 단어를 아는 줄도 몰랐고 말할 줄은 더더욱 몰랐었기에 정말 깜짝 놀랐었다.
이 아이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걸 담고 생각고 있겠구나.
내 눈앞에 무한한 우주가 자라나고 있구나.
그런 생각으로 잠시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블럽 (블럭)” 이라고 말했던 순간 느낀 놀라움은 아마 오래 간직되겠지.
새 옷을 꺼내입고 곁에서 바라보는 아이에게 “엄마 어때?” 하니까 “이뻐” 라고 말했던 순간의 놀라움과 감동도 그럴것이다.
“아빠는 토마토를 좋아해” 라고 이야기해준 며칠 후 장난감 토마토를 들고 “아빠가 좋아하는 토마토” 라고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기억해준 고마움과 기특함을 느끼는 건 어느 부모라도 마찬가지일거다.

모든 여자와 남자를 ‘엄마’,’아빠’ 로 부르던 시절엔 잡지에 정우성이 나와도 “아빠”, 스칼렛 요한슨이 나와도 “엄마” 였는데 ^^
이제 기억력과 인지능력이 좋아져서 그런일은 더 없겠지…(아쉬움이 잔뜩.)

오늘 저녁 식사후에 셋이서 참외를 먹었는데 다 먹고나서 아이가 “어, 뭐지?” 하더니 옷에 떨어진 뭔가를 주워 들며 “참외-” 한다.
예상치도 못한 아이의 80년대 코미디 같은 모습에 정말이지 우리 부부는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두 해전 세상에 나타난 작은 우주가 여전히 자라나고 있다.
조금씩 ‘언어’로 그 우주의 모습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누구 딸?” 물으면 “우리딸” 하고 대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