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은 암흑기였다. 아니 불행했던 시기였다.
나 자신에게 행복한가 물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불행하다’는 대답이 나오는 걸 깨닫고 소리죽여 울던 때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오고 가던 시기였다.
집에서 영등포를 거쳐 검은 옷을 입으러 다시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몇 시간 일찍 나와 카페를 들렀다.
빛도 산소도 없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기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기분으로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리고 가게를 나서기 전 저 하얀색 텀블러를 샀다.
처음으로 샀던 텀블러였다. 크게 필요하지도 않았고, 충동적으로, 촌스럽게 로고가 커다랗게 들어간 그걸 사 들고 나오면서
나는 뭐랄까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괜스레 반항아가 된 기분, 배짱이 두둑해진 그런 기분이었다.
덕분이었을까.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졌던 그 일 년을 살아내고
남아있는 시간을 버리고 나는 후회 없이 검은 옷을 벗고 나왔다.
성직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신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던 어느 침묵수도원에서의 그 밤에도
나는 저 텀블러에 커피를 타서 마셨다.
10년이나 시간이 지난 줄 몰랐다.
제주에 왔으니 기념 삼아 새 텀블러를 사자고 생각했을 때도 10년이나 된 줄 몰랐다.
버리기 전 기록으로 사진을 찍겠다고 두 개를 나란히 놓기 전까지는 서로 크기가 다른 줄도 몰랐다.
나 나름 예민하고 눈썰미 좋은 사람이었는데. 하하하!
10년 전 그때의 나는 지금의 이런 나를 상상하지 못했다.
농담처럼 앞으로는 평생 일요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 생활은 못하는 건가 하고 웃었지.
10년 후 어떤 모습일까 상상은 했어도 어디든 보내지는 곳에서 검은 옷을 입고 사는 삶이겠지 했는데
나는 지금 남쪽 섬에서 일요일엔 느릿느릿 노닥이다 애매한 아침을 먹고 기분따라 놀러도 나가고, 티브이를 보며 뒹굴기도 하는 삶을 보낸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내색하지도 않지만 나는 이 시간이 내게 어떻게 주어졌는지 늘 기억한다. 항상.
내 삶에서 어떤 시간을 거쳐서, 얼마만큼의 용기를 내어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일요일의 매 순간 기억하고, 안도하고, 감사한다.
사실 지인과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에 대해 서로 토로하다가
내가 있잖아, 십 년 된 텀블러를 버리려다가 연필꽂이로라도 쓸까 하고 또 끌어안고 있었어. 못 말리지? 하면서
버리기 전 사진도 찍어두고 정리에 대한 결심도 좀 다져보려고 시작한 글이었는데
어찌어찌 기억 속 시간으로 확 들어갔다 나와버렸네.
그래도 이렇게 그때를, 더불어 지금을 생각해보니 이제 정말 미련없이 버릴 수 있겠다.
버리지 못하는 낡은 물건들에 대해 그 물건의 정수-에센스-를 누렸으면 미련없이 버리라고 하던데
어쩌면 저 텀블러는 내가 처음 손에 쥐었던 그 날 모든 정수를 내게 쏟아부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마웠어. 그 시절의 나에게 힘이 되어주어서.
그리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