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May 2015

과일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피부가 흰 편이었고
세 살 터울의 남동생은 반대로 많이 까만 편이었다.
부모 중 누구를 닮아서도 아니고, 그렇게 우린 엄청나게 달랐다.

엄마는 늘 나를 가졌을 때는 그렇게 과일이 당겨서 많이 먹었고
동생을 가졌을 때는 고기가 당겼었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나는 늘 농담처럼 “바뀌었으면 어쩔 뻔했어. 까만 딸하고 하얀 아들이었으면!” 하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막상 내가 아이를 갖고 나서는 딱히 땡기는 음식이 없었다.
다들 이럴 때 신랑에게 먹고 싶은 음식 주문을 원 없이 하라고 했는데
집에서 일하며 삼시세끼 같이 먹는 신랑은 서운한 맘 느낄 새 없이 늘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어봤고
나는 매번 딱히 아쉬운 게 없었다. 그냥 당기면 시켜먹거나 사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기에 서운할 일도 없었고.

그냥 언제나 땡기는 -_- 밀가루와 탄수화물 종류 – 빵, 떡, 면을 너무 많이 먹지 않으려고 애쓰고
가능하면 제철 과일을 많이 먹어주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노력 중이고.

그런데 늘 그렇듯 새벽에 화장실을 들르며 잠이 깬 지금 시각에 딸기가 엄청나게 먹고 싶다.
평소에는 그다지 딸기를 좋아하지도 않고, 딸기 부페 같은 걸 보며 ‘정말 사람들이 저렇게 딸기를 좋아하는 걸까?’ 라고 궁금해할 정도로, 내게는 ‘제철 과일’ 이상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딸기인데
아 지금 정말 먹고 싶다.

조금만 있으면 좋아하는 복숭아가 나온다.
나는 복숭아 중에서도 ‘백도’ 만 좋아하는 편이라 ^^ 과일 중 유일하게 까다로움을 피우게 된다.
뭐 백도가 없으면 황도까지. 하지만 천도는 별로.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캠벨포도는 좋은데 머루 포도는 별로.
홍시는 좋은데 땡감은 그냥저냥.
사과나 수박은 매일 매일 먹고 싶지만, 바나나나 키위는 일년 내내 안 먹는다 해도 그냥 그냥.
토마토는 작은거나 큰거나 다 좋지만 살구, 자두, 체리는 일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은근 과일에 대한 호불호가 있었네. 나.

어쨌거나 뜬금없이 딸기가 아른거리는 새벽.
이제 제법 여름 아침 분위기가 나서 설레는 계절이다.

복숭아. 어서 만나보고 싶구나. *_*

빨래

34주를 하루 앞두고 아기옷 빨래를 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초여름처럼 따듯한 햇살과 바람이 불어서
며칠 전  벼르고 청소한 세탁기에 베냇 저고리와 손싸개, 모자, 내복과 손수건, 그리고 짱구베개를 돌렸다.
커다란 드럼 세탁조안에 아기자기하게 들어간 옷 더미를 보면서 뭔가 소꼽장난 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탈수를 마친 옷을 꺼내 탈탈 털어 건조대에 널면서부터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조그마한 옷들을 어떻게 걸어놓아야 할까 싶어 이렇게 저렇게 놓아보고
널어놓은 옷들만 봐도 아이 성별이 드러나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혼자 막 감수성이 퐁퐁 솟아 울컥할 것 같기도 하고. ^^;;

수첩에 작게 ‘첫 빨래’ 라고 적어두었다.
햇살이, 바람이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집이 아닌 다른 곳

주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제주도는 언제나 큰맘 먹고 다녀와야 할 것 같은 곳이었는데
신랑의 절친한 낚시광 후배가 제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은 덕분에
이제 제주는 언제는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곳! 이 되었다.

작년 10월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로 신세를 지고 왔다.
지난번엔 같이 회도 마구마구 퍼먹고 (거의 퍼먹는 수준)
못하는 술도 한잔 했는데 이번엔 32주를 지나면서 무거워진 배를 안고
회는 조금만, 하지만 여전히 다른 건 잔뜩 먹고 왔다. :)

제주는 섬이니까 당연히 바다가 아름답지만
난 언제나 제주에 가면 구멍 송송 난 저 까만 돌담에 매료된다.
단단하면서, 숨을 쉬고 있는 생명체 같은 느낌이다.

후배는 계속 신랑에게 제주에 내려와 같이 살자고 한다.
원래 둘은 같이 일을 했던 사이고, 둘 다 어디 사는지가 중요한 직업은 아닌 데다가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둘이서 연락을 하며 일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건 아니다.

우리도 작년 결혼 하면서 가볍게 제주에 터를 잡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냥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내려가서 지내면서 신랑은 조금 더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나? 나는 언제든 지지하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나 같은 도시형 인간이 ^^ 과연?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이야 어디 간들 크게 다르지 않을 것도 같고. 뭐 그런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초년에 역마살이 많다던 어느 역술가가 했던 말처럼
어릴 땐 이사에, 전학에 국민학교 6년 동안 다섯 군데의 학교에 다녔고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까지는 이곳 저곳 타국에서도 지냈었는데
이제 정말 인생의 중년인건지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도 ‘오래 한 직업’, ‘오래 산 동네’ 가 생겼다.
처음엔 그게 더 낯설기도 했는데 이젠 또 그러려니 한다.

누가 여행지가 좋은 것은 거기서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아서라고 하더라.
‘생활’ 을 생각하지 않아도 돼서라는 이야기겠지.
어디든 ‘로컬’ 이 되고 ‘생활’ 이 되면 다른 문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집이 아닌 곳’ 이 ‘집’ 이 되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리라는 것도.

뭐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당장 제주에 내려가서 산다는 것도 아니고
현재 내 머릿속엔 지금도 엄청나게 큰 것 같은 이 배가 막달까지 더 커진다는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헐떡인다는 생각이 제일 크기 때문에, 제주는 여전히 내게 여행지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다른 곳이 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에 바람이 새로 부는 기분이다.

역시 현실보다는 생각과 상상이 더 즐거운 법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