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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466

‘빨강’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빨간 물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생각해보라.

어둠과 얼음만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존재하는 색이라고는
하늘의 검푸른 색.
끝없이 펼쳐진 얼음벌판의 하얀 색.
시리게 하얗고 둥근 달의 노란색.
북쪽 숲 나무의 적갈색.
사람들의 눈동자에 담긴 검은 색.

한 번도 불지 않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졌다.
북쪽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렸다.
비쩍 마르고 커다란 나무들은 몸을 바람에 밀려 몸을 부딪쳤다.
바스락거리는 나무껍질들이 서로 맞닿았다.
바람은 계속 나무를 흔들었다.

맞닿아 흔들린 나무 사이에서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작고 노란 빛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생긴 빛.
빛은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또 곁의 나무로 옮겨붙었다.
시시각각 달라지고, 점점 커졌다.
커다란 하나의 살아있는 빛의 덩어리가 숲을 집어삼켰다.

처음 보는 빛, 처음 보는 색이었다.

화려하고, 두려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심장 박동을 스무 배쯤 빠르게 만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두 빨려들 것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모든 위험을 불사하고라도 삼키고 싶은
저 먼 이국의 베일 속 반짝이는 눈빛을 지닌 여인네 같은
그런 색이었다.

검푸른 하늘이 밝아지는 색
얼음 벌판이 녹아 없어지는 색
시리고 하얀 달을 사라지게 하는 색
북쪽 숲 나무를 삼켜버리는 색
사람들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색

숲을 삼키고
벌판을 삼키고
하늘을 삼키고
달을 삼키고
사람들을 삼키고

커다란 하나의 붉은 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4월을 보내는 일상.

벌써 4월이 가는 건가? 하고 깜짝 놀랐다가, 아직 한 주가 남았구나 하고 안도하다가,
아니 한 주나 며칠이나, 조만간 5월이잖아. 하고 다시금 놀란다.

집에서 일하고 있는 신랑을 두고 나왔다.
오피셜하게는 미장원에 다녀오는 건데 노트북과 수첩과 필기구를 바리바리 챙겨 두 시간 일찍 나와 카페에 들른다.
그거 들고 오는데 숨이 차다고 자리에 앉자마자 배 속의 아기는 딸꾹질을 열심히 한다.
가끔 가만히 있다가 아기가 딸꾹질을 하면 배를 쳐다보면서
“너~, 엄마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혼자 뭐 먹었어요?” 하면서 물어보기도 한다.

아직은 작은 신혼집이라 여력이 안되지만 언젠가는 ‘내 방’ 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집에서 일하며 집중해야 하는 신랑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신랑은 집에 ‘머물’긴 하지만 사실 근무하고 있는 건데 눈앞에 보이니 나는 종종 그 사실을 간과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수다를 떨거나 같이 뭘 하러 나가고 싶어한다.
많이 참아주고 있지만, 종종 흐름이 깨져서 힘들어하는 신랑을 보면 아차 싶고, 미안하고, 또 우습게도 서운하다.
그래서 난 카페 행- ^^ 을 택할 때가 있지만, 왠지 또 신랑 두고 나와 있으면 맘이 미안하다.
아아 내 마음이 문제여 -_-;;;

혼자 나와 있는 건 좋지만, 몸이 몸이다 보니 화장실도 자주 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노트북을 들고갈 수도 없고
사실 이것도 종종 곤란하다. 참다가 그냥 때맞춰 집에 돌아가기도 한다. 흑.

어제는 베이비페어에 가봤다. 생전 처음이라 겸사겸사 구경삼아 갔다.
평일이라 일해야 하는 신랑을 끌고 가서 미안한 마음에 후다닥 우리가 필요한 것들만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대충 큰 건 장만한 것 같다. 물려받은 유모차와 각종 아기용품 (공부가 많이 필요하더라;;) 덕분에 부담을 덜었다.
점점 이런저런 준비를 할수록 다가오는 ‘육아’라는 세계에 대해 긴장이 된다.
콩알만 한 사람이 하나 식구로 들어오는데 무슨 살림이 이렇게 벌써 늘어나는 것인지 *_*
새로운 존재에 대한 기대감과 나의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나날이 커진다.

나름 초반엔 태교 같은 거 생각하며 노래도 불러주고 책도 읽어줬는데
막상 아이가 제대로 듣고 기억도 한다는 지금 주 차엔 그냥 하루하루 널브러져 있다.
아니 한 주가 왜 이리 빨리 가는 건가.
4월이 다 지나간다니 허허 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올해의 봄을 나는 오래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씩 나오는 배를 내밀고 걸어 다니며 느끼는 공기를 기억하겠지.
잎이 돋아나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배 속의 아기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 시간이
오래오래 기억날 거라고 생각한다.

내년 이맘때쯤엔 유모차를 밀고 나올 수 있겠지.
순한 아기라면 유모차에서 노는 아기를 데리고 또 카페에 혼자 들를 수 도 있겠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2015년의 4월을 지난다.

봄이다 봄.

 

이른 아침의 토마토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는데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토마토가 되었다.

토마토가 과일이든, 채소든 공식적인 출신 성분과는 상관없이
어쨌거나 나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사실 1년의 시간을 생각하면 아마 토마토보다 사과를 훨씬 더 많이, 자주 먹는 것 같지만
(사과는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과일’이다. )

우리 엄마는 바쁜 워킹맘이기도 했지만, 살림에도 큰 관심이나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도시락도 부실했고 간식 같은 건 따로 챙겨줄 여력도 없었는데
기억나는 건 내가 고3 때 일 년 내내 도시락에 토마토를 넣어줬다는 거다.
아마 그게 엄마의 최대한의 노력이었을 거다.

어릴 적엔 종종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서 먹기도 했다.
영화 ‘국가대표’에서 하정우가 설탕이 뿌려진 토마토를 생모에게 받는 장면에서는
이미 내 입안에 그 맛과 향이 감돌 정도였다. 익숙하고 그리운 맛.

이제는 설탕을 뿌려 먹지도 않고, 사실 잘 익은 토마토를 통째로 씹어먹는 게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만큼 자주 사다 먹지 않는다.
대신 결혼을 하고 보니 군것질도, 과일도 그다지 챙겨 먹지 않는 신랑이 방울 토마토만큼은 앞에 놓여진 대로 다 먹는 스타일이라 큰 토마토보다는 방울 토마토를 사게 된다.
나도 옆에서 한두 개 집어먹지만 뭐랄까 뭔가 미진한 느낌이 여전히 있었다.

주말에 있던 지인들의 모임에서 선배 아빠들에게 “임산부는 하루에 하나씩 토마토를 먹는 게 좋다.” 는 조언을 들었던 신랑은 어제 장을 보면서 토마토를 사 가자 했다.
그래서 간만에 방울 토마토 대신 큰 토마토를 사 왔다.

다섯 시에 눈이 떠진 비 오는 월요일.
샤워를 하고 나서, 다시 잘까 몽롱해진 아침에 토마토를 씻는다.
앞으로 매일 하루에 한 개씩 챙겨 먹겠다 생각하니 마치 고3 때 같은 기분도 들고
뭔가 나를 위해 온전하게 치르는 의식 같아서 맘이 결연해지기도 한다.

토마토 하나로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