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August 2014

감출 수 없는 나의 재채기

#27 – 재채기

“엣취-!”
“힛- 칭..”
“우헤취!”

기침과는 또 다르게 사람마다 재채기 소리가 다르다.
갑자기 큰 소리로 터지듯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잣말하는 듯 조그맣게 숨죽이듯 하는 사람도 있고
보란 듯이 큰소리로 과장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 ‘시월애’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사람이 숨기지 못하는 게 세 가지 있는데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고.
물론 때에 따라서는 코를 막고 참을 수 있는 재채기도 있지만 내게는 기침을 재채기로 바꿔도 같을 듯하다.

나는 굳이 유형을 따지자면 갑작스레 크게 하는 스타일인데 거기다가 한 번 시작되면 최소 세 번 이상씩 연달아 한다.
일부러 그러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몇 번을 하게 될지 나도 알 수 없어서 종종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런 재채기 덕분에 (?) 얻은 학창시절의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대부분 학교마다 적어도 한 명씩은 존재하는 ‘미친 *’ 라는 체육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도 있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인상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우악스럽고 거친 인상의 남자 체육 선생님이었다.
인상처럼 수업이나 학생관리도 엄청나게 엄해서 등교 시 정문 앞에서 학생지도도 도맡아 했었는데
아침에 살 색 스타킹이 없어 다른 색 스타킹을 신고 등교했다가 걸려서 운동장을 한 바퀴 뛰게 했던 것도 그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때 어느 날인가 비가 오는 바람에 체육 수업을 실내에서 했을 때였다.
체육관이 없었기 때문에 뒷편 현관 근처 큰 실내 공간에서 모두 모여있었다.
두 줄씩 나란히 이 열 횡대로 체육 선생님 앞에 서서 뭔가 한참 반 전체가 꾸지람을 듣고 있었는데
뒤편 현관문에서 찬 바람이 불어와서 그랬는지 갑자기 나의 재채기가 시작되었다.
“엣취-”
처음 한 번을 했을 때는 선생님도, 아이들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었는데 몇 초간의 간격을 두고 재채기를 또 하기 시작했다.
“엣취-”
“그러니까 너희가 똑바로 서서…”
“엣취-”
주위 친구들이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전체가 꾸지람을 듣고 있던 터라 다들 조용했는데 그 와중에도 나의 재채기는 멈추지 않았고
다섯 번째쯤 재채기를 했을 때 갑자기 앞에 서 있던 그 무시무시한 선생님이 말하다 말고 못 참겠다는 듯 피식 웃는 거였다.
한순간 풀어진 분위기에 아이들도 와하하- 하고 웃어대고, 나는 고개 푹 숙이고 얼굴 빨개지고…

다시 선생님은 소리를 꽥 지르고 엄한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처럼 한 번 풀어진 분위기 덕에 모두 가벼워진 얼굴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그 체육 선생님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던 걸 기억한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
조용하고 조금은 나른한 오후의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열심히 설명 중이셨고 예고 없이 나의 재채기는 또 시작되었다.
한 번.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두 번, 세 번, 연신 재채기를 해대자 주위 친구들이 킥킥 대며 웃기 시작했다.
네 번. 다섯 번.
선생님은 하던 설명을 중단하고 이제 교탁에 서서 웃으며 나를 바라보신다.
여섯 번, 일곱 번.
반 친구들은 이미 큰소리로 깔깔대기 시작했고, 다행히 일곱 번쯤 하고 나의 재채기는 멈췄다.
그렇게 연달아 큰소리로 재채기를 하다가 멈췄는데 모두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아마 그때 내 심정을 상상할 수 있을 거다.

수업의 흐름은 끊어졌고, 선생님도 이 김에 쉬어가자 싶으셨는지 “너, 나와서 노래해”라며 씩 웃으셨다.
“네?? 에….”

나는 재채기 일곱 번을 연달아 하고, 얼결에 나가서 노래도 불렀다.
재채기 때문에 맹맹해진 콧소리로.

그렇게 학창시절에 가끔은 쉬어가는 쉼표를 만들었다고 자칭하는 나의 재채기가
대학생활을 지내고, 회사에 다니며 먼지 알러지가 원인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기온이 갑자기 달라지거나 먼지가 많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심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비슷한, 하지만 나보다 조금 더 알러지가 심한 신랑이랑 산다.
둘이서 교보문고 같은 사람 많은 실내 공간에 가서 5분쯤 있으면 신랑이 재채기를 시작한다.
“엣취!-” (신랑도 나처럼 갑자기, 크게, 연달아 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2, 3분쯤 있으면 나의 재채기도 시작된다.
“엣취!” “엣취-”
무슨 재채기 중창단도 아니고 누가 보면 볼 만 할 거다.

하지만 감출 수 없다고 하지 않나. 재채기와 사랑은 :)

비행기에서 만난 코끼리

#163 – 비행기에 비치된 쇼핑 카탈로그에서 무엇을 사고 싶은가? 왜 그걸 사고 싶은가?

비행기 내에서 면세품을 사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지만 역시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쇼핑 카탈로그는 들여다본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본다.
그냥 기내에 있는 읽을거리여서이기도 하고 – 게다가 사진도 있는-
만일 산다면 무얼 살까 하는 상상을 즐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 기내 카탈로그를 봤을 때 알게 되었던 사실은
어릴 적 어쩌다 내 손에 들어왔던 비행기 장난감이 사실 기내에서 파는 물품이었다는 거였고
단순한 기념품이 아닌 – 예를 들면 목걸이 같은- 물건들도 판매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나중에 조금 더 지나고서는 대부분의 기내 물품들은 면세점을 채 들를 시간이 없던 사람들이나
미처 선물을 사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뭔가 카탈로그를 구경하는 게 조금 더 시들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페이지를 넘기며 구경하는 건 재미있다.

그런데 조금 더 재미난 물품들이 있으면 안 될까?
매번 비슷비슷한 술, 귀금속, 화장품, 초콜릿 같은 거 말고 좀 의외의 물건들.
엽서 크기의 명화 포스터라던가, 웃기게 생긴 팝콘 기계라던가,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상당히 어려운 고급 퍼즐 세트라던가, 색색의 운동화 끈이라던가.
면세품으로써는 말도 안 될지 모르지만, 재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나는 조금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고 싶은 마음이 들 텐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조금 더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을까? 뭐, 막상 사려고 할지는 의문이지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타이항공에서 본 코끼리 캔들 홀더와 코끼리 목걸이는 정말이지 혹했다.
코끼리와 비행기에서 만나 하늘을 날아 함께 집에 오고 싶었다고.
나처럼 코끼리를 정말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타이항공 기내 판매품은 너무 위험하다. 하하하.

저녁밥과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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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는 법을 언제 처음 배웠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손바닥을 넣어서 손등이 물에 잠길 정도로 밥물을 부으면 된다고 엄마는 알려줬다.
그래서 그 지식 하나로 한동안 밥을 해 먹었고
현미밥을 하면서 물에 불리거나, 불리지 않으려면 물을 더 많이 부어야 한다는
또 다른 지식을 하나 더 추가해 그걸로 밥을 해 먹고 산다.
생각해보면 이런 거야말로 사소하고, 진짜 유용한 삶의 지식이지 싶다.
이런 사실에 혼자 감탄하고 있는 건 생각하면 좀 웃기지만.

그동안 나는 쌀, 현미를 1:1로 섞어 먹다가 어제부터 100% 현미밥을 시작했다.
평소 둘이 먹는 만큼의 양을 넣고 밥을 했는데 밥이 적었어. 왜 그랬을까.
그 적은 밥을 둘이 나눠서 먹었다.
적었는데 아무 말 없이 모르는 척 먹어준 신랑. 배고팠을 거면서.

결혼 전 신랑이 쓰던 6인용 밥통은 신혼집 이사 직전에 고장이 났다.
둘이 각각 가지고 있는 살림들에 대해 고심하던 차라서 잘됐다 하고 버리고 와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밥통은 내가 쓰던 조그만 3인용 밥통이다.
주로 한 끼만 해 먹는 우리에게 지금은 충분한데, 아마도 식구가 늘면 큰 게 필요하겠지.
‘식구 食口’ 니까.

런던에 살 적에도 밥은 하루 한 끼만 먹었다.
손바닥만 한 기숙사 방에 밥통을 놓고 저녁 식사 만큼은 밥을 해서 먹었다.
반찬을 제대로 만들줄 도 몰랐으니 대부분 비빔밥, 아니면 볶음밥이었고
이도 저도 아닐 때는 물에 말아 먹기도 했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밥과 김치를 좋아해서도 아니었고.
오히려 면이나 빵에 더 손이 가는 내 식성이지만 그래도 밥을 하는 건 좋았다.

밥을 먹는 것 보다 하는 것이 좋았던 건 뭔가 엄마 같은, 어른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쌀을 밥통에 넣고, 쌀알이 물에 쓸려나가지 않게 조심조심 몇 번씩 헹구고
마지막에 손바닥을 쫙 펴서 넣고 밥물을 가늠하는 단순하고 조용한 움직임.
그건 일종의 자신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기도 했다.
넌 이제 어른이야. 넌 이제 조금 더 용감해져도 돼. 넌 이제 울면 안 돼 같은.

타지에서 밥을 하고, 독립해서 밥을 하고, 이제 결혼해서 두 사람분의 밥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내게 ‘이제 어쩌면 너는 어른이니까 괜찮아.’ 라고 말한다.

괜찮지 않으면 좀 어떻겠나.
선 밥이거나, 진밥이어도
밥을 매일 하듯이, 매일 어른이 되면 되지.
매일 용감해지고, 매일 더 씩씩해지면 되지.

밥 냄새가 난다.
나는 오늘의 어른이 되어 오늘의 저녁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