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July 2014

밤의 책상

#111- 당신의 책상은 밤에 무슨 생각을 할까?

이사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여전히 내 얼굴은 수많은 책들 아래 깔려있다.
전에도 물론 어느 한구석엔 몇 권씩 책들이 쌓여있긴 했지만
이렇게 ‘전면적’으로, ‘오래’ 방치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난 더는 창밖을 바라볼 수도 없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건 정말 준비되지 않는 유배나 다름없다.

그녀는 창가에 앉는 걸 좋아했다.
항상 커다란 창 아래 내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내 얼굴 위가 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건 아니었고,
종종 나는 컴퓨터와 키보드를 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침대보다 내 자리를 먼저 마련해두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이 방의 그 어떤 가구보다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저 책장과 늘 붙어 다니는 건 맘에 안 들었지만.

햇빛이 드는 창가도 아니고, 사용되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렇게 놓이게 된 건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녀에게 ‘방’ 이 아닌 ‘집’ 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더는 ‘방’의 공간에서 중심인물이 아니었고
‘집’에 속한 ‘어느 방’에 놓인 그냥 그런 가구가 되었다.
게다가 내가 있는 방에는 또 다른 ‘책상’ 이 있었다.
창가에 놓인, 나보다 더 크고, 늠름한 그 책상에선 종일 그녀의 남자가 앉아서 일했다.
생각해보라. 내 얼굴 위에 쌓인 책들 사이로 겨우 눈을 내밀어
바로 곁에서 종일 으스대며 일하는 책상을 보는 내 심정을!

그녀는 그럼 어디에 있는 거지?
책 사이로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녀가 부엌에 놓인
식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탁? 밥을 먹는 그 식탁?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나를 놓아두고?

그런데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한 쪽에 작은 화분과 쿠키 통이 놓인 식탁에서 글을 쓰는 그녀는
더는 불안해 보이지도,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아득해졌다.

밤이 되었다.
일을 마친 그 남자는 불을 껐고, 방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도 으쓱한 기분으로 나를 바라보는 옆 책상이 느껴졌지만
난 여전히 아무 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무너진 내 마음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전히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난 그녀가 그리웠다.
이렇게 불 꺼진 방에서 문 너머 너머에 있는 그녀가 야속했다.
내 얼굴에 엎드려서 졸기도 하고, 가끔은 울기도 하던 그녀가 그리웠다.
좋아하는 엽서나 메모들을 유리바닥 아래에 차곡차곡 넣어두던 일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나는 그냥 평범한 가구가 된 것이다. 의자나, 침대 같은 다른 가구들처럼.
아마 책을 쌓아두거나, 컴퓨터를 올려두는 커다란 선반이 나의 새로운 역할이 되겠지.
어쩌면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내 한쪽 다리라도 부러져 우르르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면,
그제야 그녀는 나를 다시 돌아볼까?

모르겠다.
오늘따라 얼굴 위의 책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밤은 길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 사람의 얼굴

# 274 –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라.

일단,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는 일이 가능할까 생각했다.
또한,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 이외의 사람을 ‘묘사’하는 일이 가능할까 또 생각했다.

처음 보았던 그 사람의 인상은 부드러웠다.
20대 후반에 처음 만났던 그 사람은 당시 자기 홈페이지의 느낌처럼 부드러웠다.
나처럼 동그란 얼굴형도 아니었는데, 그 사람의 느낌은 오히려 온화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오뎅집의 노란 불빛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건 아니었을 거야.

3년 전 우리가 오랫만에 또 만났을 때
내가 받은 첫 느낌은 ‘길다’ 였다.
이제 둘 다 나이를 먹어서, 30대 중반을 넘어서서
그리고 근 3년만에 얼굴을 마주 보는 거여서
난 사실 깜짝 놀랐었다.
나이를 먹은 그 사람의 얼굴이 어색했었다.
물론, 그 사람은 내 모습이 더 낯설었겠지만.
오래간만에 만나서, 아마 우린 우리의 그동안의 세월을 가늠했을 것이다.
서로의 얼굴에서.

3년 가까이 연인이란 이름으로 새로 만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새로운 얼굴들을 보았다.
난 종종 눈을 감고 있는 그 사람의 속눈썹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고
누워서 자는 그 사람의 발을 쓰다듬는 걸 좋아했고
일하고 있는 뒷모습을 비스듬히 볼 때 보이는 그의 옆모습을 좋아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제 남편이 된 그는
여전히 소년의 눈을 가지고 있다.
동그랗고, 얌전한 쌍꺼풀이 있는 눈.
뭔가 잘 안되어 가거나, 인상을 쓸 때면 쌍꺼풀이 사라지고 날카로워지는 눈을 가졌다.
날 보면서 온화하게 웃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같은 눈을 가졌다.
드물지만, 박장대소하고 웃을 때 짓는 눈웃음도 보고 있으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아, 이 사람이 웃는구나.

코나 입 보다,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건
그 사람의 뺨이다.
양손을 뺨에 얹으면, 따듯하고 소중한 느낌이 든다.
마주 보고 있는 얼굴이 더더욱 소중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어깨가 있다.
시간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일하는 그 사람의 어깨와 등은
어느 때는 무심한 벽 같고,
어느 때는 든든한 커다란 의자 같다.

그리고 따듯한 손.
쑥스러워하면서, 여전히 어색해하면서도 잡아주던 손.
따듯하고,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

이 모든 것이 내게는 그 사람의 얼굴이다.
그 사람의 모습, 그 사람의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