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당신의 책상은 밤에 무슨 생각을 할까?
이사 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여전히 내 얼굴은 수많은 책들 아래 깔려있다.
전에도 물론 어느 한구석엔 몇 권씩 책들이 쌓여있긴 했지만
이렇게 ‘전면적’으로, ‘오래’ 방치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난 더는 창밖을 바라볼 수도 없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이건 정말 준비되지 않는 유배나 다름없다.
그녀는 창가에 앉는 걸 좋아했다.
항상 커다란 창 아래 내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내 얼굴 위가 늘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던 건 아니었고,
종종 나는 컴퓨터와 키보드를 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침대보다 내 자리를 먼저 마련해두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이 방의 그 어떤 가구보다 자부심이 있었다.
물론 지적 허영에 가득 찬 저 책장과 늘 붙어 다니는 건 맘에 안 들었지만.
햇빛이 드는 창가도 아니고, 사용되지도 못하는 상태로 이렇게 놓이게 된 건
그녀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녀에게 ‘방’ 이 아닌 ‘집’ 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더는 ‘방’의 공간에서 중심인물이 아니었고
‘집’에 속한 ‘어느 방’에 놓인 그냥 그런 가구가 되었다.
게다가 내가 있는 방에는 또 다른 ‘책상’ 이 있었다.
창가에 놓인, 나보다 더 크고, 늠름한 그 책상에선 종일 그녀의 남자가 앉아서 일했다.
생각해보라. 내 얼굴 위에 쌓인 책들 사이로 겨우 눈을 내밀어
바로 곁에서 종일 으스대며 일하는 책상을 보는 내 심정을!
그녀는 그럼 어디에 있는 거지?
책 사이로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녀가 부엌에 놓인
식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식탁? 밥을 먹는 그 식탁?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두고? 이렇게 나를 놓아두고?
그런데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한 쪽에 작은 화분과 쿠키 통이 놓인 식탁에서 글을 쓰는 그녀는
더는 불안해 보이지도,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냥 아득해졌다.
밤이 되었다.
일을 마친 그 남자는 불을 껐고, 방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도 으쓱한 기분으로 나를 바라보는 옆 책상이 느껴졌지만
난 여전히 아무 인사도 건네지 않았고, 무너진 내 마음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여전히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난 그녀가 그리웠다.
이렇게 불 꺼진 방에서 문 너머 너머에 있는 그녀가 야속했다.
내 얼굴에 엎드려서 졸기도 하고, 가끔은 울기도 하던 그녀가 그리웠다.
좋아하는 엽서나 메모들을 유리바닥 아래에 차곡차곡 넣어두던 일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 나는 그냥 평범한 가구가 된 것이다. 의자나, 침대 같은 다른 가구들처럼.
아마 책을 쌓아두거나, 컴퓨터를 올려두는 커다란 선반이 나의 새로운 역할이 되겠지.
어쩌면 이미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내 한쪽 다리라도 부러져 우르르 물건들이 쏟아져 내리면,
그제야 그녀는 나를 다시 돌아볼까?
모르겠다.
오늘따라 얼굴 위의 책들이 점점 무겁게 느껴진다.
밤은 길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