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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210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이라는 주제를 보고 생각난 건 어릴 적 사진이다.

사진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지나간 시간의 순간을 기록한 것이고
사진으로 남겨지고, 보관된 지나간 시간이라는 것은 그리움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비록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사진은 몇 개월 때의 모습인지 모르겠다.
돌사진엔 무언가를 붙잡고 서 있었으니 아마 그보다는 조금 더 지나서였겠지.
나는 11월생이니 아마도 그다음 해 여름쯤 되었으려나.

4등신의 키에 불뚝 나온 D라인의 배와 타이어 광고 마스코트 같은 토실토실한 팔뚝.
게다가 동그란 바가지 머리에 무념무상의 표정이라니.
엄마는 손으로 채 뭔가를 잘 잡지 못하는 아기인 날 위해 풍선을 손목에 매달아주었다.
그리고 저긴 아마 동네 어딘가의 골목길, 누군가의 집 앞이었을 것이다.

저 날의 사진이 몇 장 있다. 전부 골목길에서 찍었다.
걸어가는 뒷모습이거나, 계단참에 앉아서 짧은 다리를 달랑 달랑 흔들거나.
매 사진마다 빨간 풍선이 마치 호위무사처럼 내 곁에 두둥실 떠 있다.

내가 이 사진을 아끼는 건
지금은 기억할 수 없는  ‘나’지만 지금의 내가 모르는 ‘나’.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꿈꾸었을지 모를,
그 어떤 사회적 교육이나 제도에도 길들지 않았던 시절의,
겨우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당당하게 우뚝 두 발로 서서 있는 ‘나’
그 ‘나’의 모습이어서 뭔가 뭉클하기 때문이다.

종종 상상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나와 마주하고 대화하는 상상.
그림을 망쳤다고 울고 있는 1학년 꼬마 나에게는 괜찮다고, 충분히 멋진 그림이라고 말해주고
무거운 책가방에 한숨 쉬던 중학생 나에게는, 다 순조롭게 흘러가서 멋진 추억이 될 거라고 말해주고
나쁜 남자랑 연애하며 울던 20대의 나에게는 나중에 정말 좋은 사람과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꼭 끌어안아 주는 상상.

그런데 이 사진 속의 꼬맹이에겐 그 어떤 위로도, 격려도 필요 없을 것만 같다.
그냥 뒤뚱뒤뚱 용감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지금의 내가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저 사진속의 나에게 배경음악으로 불러주고 싶다. :)

#143

#143

내가 알고 있는 내 모습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 모습.

penguin_

 

콩이는 형과 누나가 셋이나 있었다.
엄마와 아빠, 큰 형, 큰 누나, 작은 형 그리고 콩이.
이렇게 여섯 식구는 황제펭귄 가족이었다.

콩이의 아빠는 키도 훤칠했고 가슴에 털도 멋지게 나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펭귄 무리에서 가장 멋진 목소리로 노래했다.
큰 형은 듬직한 어깻죽지를 가졌고 수영에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큰 누나는 누구보다 우아하게 얼음 위를 걸어 다니고 절벽에선 멋지게 슬라이드를 했다.
작은 형은 바다로 다이빙해 반짝이는 까만 부리로 물고기를 낚아채는 사냥의 일인자였다.
콩이는 그냥 막내 콩이었다.
솜털만 보송보송할 뿐 아직 멋진 가슴 털도 없고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에 ‘끼익 끼익’ 거리는 작은 목소리를 가졌다.
게다가 아직도 종종 얼음판 위에서 걷다가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깊이 수영해서 물고기를 사냥하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나는 언제쯤 우리 식구들처럼 멋진 황제펭귄이 될 수 있을까. 왜 나만 이렇게 작고 솜털 투성인걸까?”
콩이는 늘 멋진 가족들을 보면 자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속상했다.

오늘은 펭귄 유치원에서 자기 모습을 그려 오는 숙제를 내줬다.
콩이는 커다란 종이 위에 자기 모습을 쓱 그렸다가 망설였다.

“너무 크게 그렸나 봐. 나는 아빠만큼 키가 크지도 않은데.”
콩이는 처음 그렸던 모습을 지우고 절반만 하게 다시 그렸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는 모습을 그렸다가 또 망설였다.
“난 큰 형처럼 단단한 어깻죽지도 없는데….”
콩이는 네모나고 커다랗게 그린 어깨를 지우고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를 다시 그렸다.
멋지게 얼음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건 작은 형 같아 보여서 콩이는 다시 망설였다.
대신 멋지게 얼음 절벽을 슬라이드 해서 내려오는 신나는 모습을 그릴까?
콩이는 생각했지만, 그건 큰 누나의 모습 같아서 그냥 얼음판에 서 있는 자기를 그리기로 했다.
대신 커다란 물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콩이는 또 망설였다.
“난 작은 형처럼 멋지게 물고기 사냥을 할 수도 없는걸…”
콩이는 큰 물고기를 지우고 자기 손바닥만 한 작은 물고기를 그렸다.

콩이는 그냥 심심한 얼음 벌판 위에 조그마한 펭귄이 작은 부리로 더 조그만 물고기를 입에 물고
동그란 어깻죽지에 이어진 작은 팔을 펼치고 가만히 서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래. 이게 내 모습인걸.”
콩이는 자기 모습이 싫진 않았지만 조금 아쉽고 속상했다.

그림을 그려놓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콩이에게 엄마가 다가왔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언제나 콩이를 이해하는 엄마는 콩이를 안아주며 말했다.
“콩이는 아직 자라는 중이란다. 조금만 지나면 아빠나 엄마, 형들이나 누나만큼 멋진 황제펭귄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아마 알게 될 거야.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엄마의 아들인지”
콩이는 엄마 품에서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엄마 말처럼 정말 자기도 멋진 황제펭귄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추운 바람이 불던 몇 달 후 남극 펭귄 마을에 새로운 손님들이 나타났다.
커다란 물건을 가득 싣고 와서 천막을 쳐 놓고 엄마 아빠보다 큰 키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펭귄들은 호기심에 우르르 몰려가 구경을 했고 콩이와 친구들도 같이 따라갔다.
그 사람들은 펭귄 식구들을 좋아했다. 매일매일 커다랗고 까만 네모난 상자를 들고 펭귄 식구들을 몇 시간이고 따라다니기도 했고 가끔 콩이와 친구들이 옆에 가서 기웃거리면 큰소리로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하루는 콩이가 혼자 다가가 기웃거리며 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커다란 상자에서 반짝이는 판을 꺼내 콩이 앞에 펼쳐 세웠다.
펼쳐진 판을 본 콩이는 깜짝 놀랐다. 그 속에는 처음 보는 멋진 황제펭귄이 콩이와 마주 서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누구인지 궁금해 다가가니 그 펭귄도 콩이에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안녕하세요?” 하며 콩이가 오른팔을 들었더니 맞은편 펭귄도 입을 벌리며 똑같이 한쪽 팔을 들었다.

콩이는 문득 멈춰 서서 가만히 왼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맞은 편 펭귄도 콩이와 같은 방향으로 동시에 한 걸음 걸었다.
콩이가 두 팔을 활짝 올렸더니 맞은 편 펭귄도 똑같이 활짝 팔을 올렸다.

거울을 처음 본 콩이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평소에 바닷물에 콩이가 얼굴을 비춰보는 것처럼,
뭔가 이것도 반대편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럼, 맞은편에 콩이가 하는 대로 똑같이 움직이고 있는 저 펭귄은 바로 콩이인걸까?

콩이가 잔잔한 바닷물에 가끔 얼굴을 비춰볼 때는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봐야 했기 때문에
얼굴이 커다랗게, 그리고 가슴이 살짝 보이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똑바로 서서 마주 보는 콩이의 모습은 그동안 콩이가 알던 자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콩이는 다시 거울 속 맞은편 펭귄을 천천히 살펴봤다.

콩이는 어느새 아빠처럼 키가 훌쩍 커 있었고
어깨와 양팔은 큰 형처럼 튼튼하고 길쭉했다.
콩이의 부리는 작은 형처럼 까맣게 반짝였고 얼음 위를 걷는 모습은 큰 누나만큼 우아했다.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는 일도 없었다.
얼마 전에는 펭귄 학교 선생님이 콩이에게 엄마처럼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한 적도 있었다.

가만히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콩이 곁으로 엄마와 아빠, 형들과 누나가 다가왔다.
맞은편에 보이는 6식구의 모습은 완벽하고 당당한 황제펭귄 가족의 모습이었다.
모두 윤기나는 검은 털과 반짝이는 부리, 그리고 당당한 가슴을 내밀고 함께 서 있었다.

콩이의 마음속에 살던 보송보송한 솜털의 새끼 펭귄이 거울 속 늠름한 콩이에게 속삭였다.
“넌 정말 멋진 황제펭귄이야.”

 

#466

#466

‘빨강’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빨간 물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생각해보라.

어둠과 얼음만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존재하는 색이라고는
하늘의 검푸른 색.
끝없이 펼쳐진 얼음벌판의 하얀 색.
시리게 하얗고 둥근 달의 노란색.
북쪽 숲 나무의 적갈색.
사람들의 눈동자에 담긴 검은 색.

한 번도 불지 않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점점 거세어졌다.
북쪽 숲에서 나무들이 흔들렸다.
비쩍 마르고 커다란 나무들은 몸을 바람에 밀려 몸을 부딪쳤다.
바스락거리는 나무껍질들이 서로 맞닿았다.
바람은 계속 나무를 흔들었다.

맞닿아 흔들린 나무 사이에서 하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작고 노란 빛이 생겨났다.
처음으로 생긴 빛.
빛은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또 곁의 나무로 옮겨붙었다.
시시각각 달라지고, 점점 커졌다.
커다란 하나의 살아있는 빛의 덩어리가 숲을 집어삼켰다.

처음 보는 빛, 처음 보는 색이었다.

화려하고, 두려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심장 박동을 스무 배쯤 빠르게 만드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두 빨려들 것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모든 위험을 불사하고라도 삼키고 싶은
저 먼 이국의 베일 속 반짝이는 눈빛을 지닌 여인네 같은
그런 색이었다.

검푸른 하늘이 밝아지는 색
얼음 벌판이 녹아 없어지는 색
시리고 하얀 달을 사라지게 하는 색
북쪽 숲 나무를 삼켜버리는 색
사람들의 눈동자를 가득 채운 색

숲을 삼키고
벌판을 삼키고
하늘을 삼키고
달을 삼키고
사람들을 삼키고

커다란 하나의 붉은 색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