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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절

아기가 감기에 걸렸다.
4일째 조그만 코에서 콧물이 줄줄 흐른다.
게다가 연신 재채기를 하는 신랑을 걱정하다가 내가 덜컥, 그것도 제대로 감기가 들었다.
세 식구가 골골골 하는 시월이다.

어제부터 바람이 달라졌다.
날씨 만큼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바람이 딱 그렇다.
여러해 전 기억들이 물 밀듯이 밀려와서 아득할 지경이다.
일상에서 뭔가 새로운 생각이 들면 무조건 계절탓, 날씨탓이라 말한다며 지인과 웃었는데
사실 정말 그렇다. 날씨가 달라지고, 계절이 달라지면 뭔가 확실히 달라진다.
기억들을 회상하다보니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은건가! 싶기도 하고
아아 중년인건가- 싶기도 하다.

작년엔 아기에게 태교차 떠 놓았던 조끼와 후다닥 남은 실로 떴던 요정모자를 입혔는데
그리고 기운이 남아서! 판초를 뜨다 말았다.
내게는 찬바람이 부는 10월이 되었다는 건 다시금 털실을 끌어안을 시기라는 뜻이다.
일단 판초를 얼른 떠서 올해는 꼭 입혀야하는데 아직 앞판의 1/2 정도밖에 진도가 안 나가서 허허허.
가끔 그럴때마다 뜨게질이란 나에게 뭔가 싶다. 겨울을 위해 쟁여놓은 식량같은 느낌 :)
하여간 더 늘어지면 정말 귀찮아지겠구나 싶어서 요즘 조금씩 하고 있다.

10월이 시작되던 날 티브이에서 앵커가 “이제 올해 달력도 세 장 남았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말에 아 어느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기’를 사랑하는(이라고 쓰고 ‘분기별 계획 짜기를 좋아하는’이라고 읽는다 *_*) 나에게 올해의 마지막 분기인데도
그저 뜨게질이나 끝내볼까 하는 소박한 바람뿐이다.
운동이나 책 읽기도 뭔가 흐지부지. 에너지가 간당간당 하다.

고백하자면, 요즘은 종종 혼자 독립해서 살던 싱글라이프 생각을 한다.
그때는 그때 나름의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내 공간, 내 시간이 조금 그립다.
이것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내게 다시 생겨날까?
그랬으면 좋겠다. 마루 한 구석 작은 테이블과 하루 두어시간이라도 :)

돌아갈 곳.

3주만에 집에 돌아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닥에 얌전히, 켜켜이 쌓였을 먼지덕에 마룻바닥은 비현실적으로 푹신하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겠지. 푹신할리가.

공항에서 집에오는 택시안에서 곤히 잠들었던 아이는 집에 들어서면서 눈을 뜨더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장난감들을 보더니 감탄사(라고 생각되는 소리)를 내뱉으며 흥분해서는
구석 구석의 장난감을 꺼내 논다.
‘기억’이라는 것. 15개월 아기에게도 이미 ‘기억’의 역사가 생기고 있구나 싶었다.
하긴 나도 3주만의 내살림이 새로운데 왜 아니겠어.

냉장고에 좀비들이 쌓여있고 친정에서 박스로 부친 물려받은 아기책들도 정리해야하는데
그냥 여러가지 감정상태로 손 놓고있다.
아기와 즐겨보는 에니메이션 ‘꼬마의사 닥맥스터핀스’ 식으로 이 상태를 정의하자면
‘아무것도 하기싫어 증후군’ 내지는 ‘머릿속이 멍해 증후군’ 정도 될것이다.

친정생활도 그저 맘 편하기만 했던건 아니었기에 돌아와서 편안한것도 있고, 또 몸이 힘든것도 있고
무엇보다 제주로 돌아오면서 여전히 떨칠 수 없는 고립감이 늘 이런 복잡한 마음상태를 만들어낸다.
이럴때 해야만 하는 집안일이 있다는 건 고맙기도 한데 ^^ 엄청나게 귀찮기도 하다.

돌아오니 가을이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왔다는 제주는 앞으로도 며칠은 계속 비가 내릴것 같다.
그래도 빨래를 돌리고, 제습기를 돌리고, 여름옷을 정리한다.
올 여름에 입힐 아기옷을 사면서 설레었던게 얼마전 같은데 이제 한 철 입고 작아진 옷들도 생겨서
정말 내가 몽롱한 시절을 보내도 아기는 쑥쑥 자라는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긴장감이 든다.

티브이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올해도 이제 달력 세 장만 남았다는 이야기에 허허허 너털웃음이 나왔다.
정말 나이를 먹으면서 시간이 이렇게 빨리가는건가? 허허허.

불면의 밤

간만에 또 불면의 밤이다. 자정을 넘겨서 자는 날은 새벽에 깨서 잠 못들 확률이 절반쯤은 되는 것 같다. 

세시가 넘어 잠자리에 든 신랑의 불규칙한 – 쉬다 말다 하는 수면 무호흡증- 숨소리가 걱정스러워 더 예민해지고 자다가 가끔 애앵 울어대는 아기 침대로 가서 토닥이고 그러다보면 이 생각 저 생각에 배도 고픈 것 같고 일어나기엔 기분 좋은 이불속에서 뒹굴뒹굴 하다보면 창밖이 환해진다. 

하루에 30분씩 혼자 걷는 시간이 필요해.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야하는데.
부엌 아일랜드 위 잡동사니 정리 좀 해야지. 
원두 갈아 커피 마시고 싶다 등의 생각을 하다보면 어느새 신랑은 규칙적으로 코를 골고 있고 사방으로 굴러 다니던 아기도 얌전히 누워 새근거리고 있고 두 사람 사이 침대 모서리에 모로 누워있는 나는 다시금 잠을 청할까 이대로 일어날까 고민한다. 

지금이 그런 순간. 

머릿속이 꽉 차 있는데 말로도 글로도 담아내지 못하는 요즘이다. 

고프다. 대화도 배도 잠도.